당신은 다혈질입니까? 아니면 담즙질입니까?

직장생활하면서 가끔은 끔찍한 질책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적어도 그렇다. 물론 선배들의 얘기나 상황으로 보면 당연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간다. ) 이른바 히포크라테스의 기질론에 입각해서 보면 다혈질이라는 인간기질이 등장한다. 그러나 다혈질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건이 터지면 물불 안가리고 조지고 깨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내가 '핏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장님을 모시던 팀장 시절의 얘기이다.

때는 추석철로 관계사에서 식용유 500개를 고객들에게 감사의 선물로 배포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보내왔다. 그 식용유 500개는 당시 마케팅 팀장인 나에게 업무로 할당되었고, 120여개의 지점에 합당한 이유를 배경으로 배정해 주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A4 한 장에 말끔하게 정리해서 부장에게 결재를 받았다. 뭐 이런 것을 품의해야 하는 생각이었지만, 계통과 절차에 익숙하지 않는 나는 무시할 수 없는 전통에 따르기로 했고, 결재는 순서대로 이어졌다. 통상적으로 팀장이 결재하면 부장이 결재판을 들고 이사와 상무, 전무, 부사장을 겨쳐 대표이사까지 결재를 맡는데, 이것은 회사나 경우마다 다른 것이 원칙이기도 했다.

그날 부장은 이사에게 결재를 맡는 일을 대신 시켰고, 결재를 하고는 그냥 통과시키는 바람에 나는 대표이사 비서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순서가 된 것이다.

비서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사장실 안에서 들려오는 천둥같은 고함에 겁이 질렸고, 잠시 후 결재판을 들고 나오는 고참 부장의 얼굴색은 흑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결재판 안에 있는 서류들은 이리 저리 꺾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장실에서 비산세례 (하늘로 날았다가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다음은 내 차례, 그 상황에서 나는 뒷걸음이 최선인 줄 알았지만 미룰 수 없는 압박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부사장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밀고 들어가야 할 태세.

김 사장님은 담즙질일까? 아니면 다혈질일까?

질책이 무서워서 결재를 지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니,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팔뚝 중간쯤에 감아걸치고 스모선수처럼 주먹을 쥔 채로 허리춤에 각을 잡고 앉으신 사장님은 대뜸, "김팀장, 뭔가?" 하는 말씀으로 결재 준비를 마치셨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심장은 콩알만해졌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목소리는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관계사 지원 사은품 배분에 관한 사항입니다. " 사장님은 서둘어 내가 양 손으로 들고 있는 결재판을 빼았았고, 결재판이 열리자 마자 덮어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김팀장이 알아서 해! 이런 것까지 사장 결재를 받아야 하나? 그리고 다른 윗사람들은 모두 휴가갔나? 왜 자네가 들어왔나?" 난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핏대'가 관자놀이에 벌써 딴딴하게 핏발이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급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의 사안은 제가 직접 사장님께 결재를 받아도 될 사안으로 판단되어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말이 되나? 말이 맞나? 하는 자문 속에 사장님께서 어진 목소리로 화답하셨다. "그렇지 김팀장, 자네처럼 본분에 맞는 판단이 필요하지... 나가면서 비서보고 물 한 잔 들여보내라고 해! 아까 말이야, 박부장이 왔었잖아? 그 친구 인사평가 꼴지인데 청원휴가내고 MBA 가겠다고 오질 않았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친구가 MBA 같다오면 무슨 수가 생기나? 날마다 골프공만 쫓아다닌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그 친구 부서 경비를 몽땅 개인경비로 쓴다는 첩보도 있어... 아무튼 수고하게."

나라도 핏대세워가면서 고함 질렀겠다.

내가 만든 원안 대로 관계사가 보내준 식용유가 배포되었고, 가끔 사장님을 복도에서 뵙거나 결재를 대신할 때면, 자애로운 말씀으로 대해주셨던 담즙질의 인간성을 보여주셨다.

그 분이 요즈음 사모님께서 외출을 제한 하시는 통에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나신 지 꽤 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치매 증상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알길은 없지만, 존경하던 분이라, 생전에 건강하신 모습으로 우렁찬 고함을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엽기적일까? 아무튼 내가 모셨던 그 분은 다혈질이 아닌 담즙질임이 분명했다.







Wise Saying
아무리 사소한 태도라도 평소에 무시해 버리면, 정말로 그 자세가 필요할 때는 엉뚱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에도 평소에 매너를 익히도록 해야 한다. -체스터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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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12, 2008 06:58 05 12, 2008 06:58
개구리운동장
Business 05 12, 2008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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