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
 


끝내 이기기를 응원합니다.

2017.03.16 02:00


6년 전 아들 동찬이가 삭발하고 재수할 당시의 사진이네요. 

아마 이때는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을겁니다.


어느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취업을 위해서는 그보다 아주 많은 고민과 좌절을 잘 감내하더군요.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어렵사리 취직이 확정되고도 아들 스스로가 믿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엇그제는 깍듯하고 공손하게 퇴근 인사를 하면서 '제 명함입니다.'라고 

새로받은 명함을 건네주는 모습에 조금 울컥했습니다.


그런데 다 끝난 것이 아니더군요

뒤를 보니 한 학기 남은 대학생 딸아이가 있더군요. 


프로의 세계에 도전장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네요.

문이 좁다는 문과에다, 여성이기에 깨야할 유리천장도 있다는데, 


끝내 이기기를 응원합니다.



 
0 Comments

이 글이 속한 카테고리는 개인Private/인물Who 입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03.10 12:18

지금부터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선고에 앞서 이 사건의 진행경과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재판관들은 지난 90여일 동안 이 사건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왔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도 많은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재판관들은 이 사건이 재판소에 접수된 지난해 12월 9일 이후 오늘까지 휴일을 제외한 60여일간 매일 재판관 평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재판과정 중 이루어진 모든 진행 및 결정에 재판관 전원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사항은 없습니다. 저희는 그간 3차례의 준비기일과 17차례에 걸친 변론기일을 열어 청구인 측 증거인 갑(甲) 제174호증에 이르는 서증과 열두 명의 증인, 5건의 문서송부촉탁결정 및 1건의 사실조회결정, 피청구인 측 증거인 을(乙) 제60호증에 이르는 서증과 열일곱 명의 증인(안종범 중복하면 17명), 6건의 문서송부촉탁결정 및 68건의 사실조회결정을 통한 증거조사를 하였으며 소추위원과 양쪽 대리인들의 변론을 경청하였습니다. 증거조사된 자료는 4만8000여쪽에 달하며, 당사자 이외의 분들이 제출한 탄원서 등의 자료들도 40박스의 분량에 이릅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아시다시피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입니다. 재판부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역사의 법정 앞에 서게 된 당사자의 심정으로 이 선고에 임하려 합니다. 저희 재판부는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이루어지는 오늘의 선고로 더 이상의 국론분열과 혼란이 종식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법치주의는 흔들려서는 안 될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 가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 사건 탄핵소추안의 가결절차와 관련하여 흠결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소추의결서에 기재된 소추사실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아니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헌법상 탄핵소추 사유는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사실이고 여기서 법률은 형사법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탄핵결정은 대상자를 공직으로부터 파면하는 것이지 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피청구인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고 심판대상을 확정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관계를 기재하면 됩니다. 이 사건 소추의결서의 헌법 위배행위 부분이 분명하게 유형별로 구분되지 않은 측면이 없지 않지만, 법률 위배행위 부분과 종합하여 보면 소추사유를 특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사건 탄핵소추안을 의결할 당시 국회 법사위의 조사도 없이 공소장과 신문기사 정도만 증거로 제시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국회의 의사절차의 자율권은 권력분립의 원칙상 존중되어야 합니다. 국회법에 의하더라도 탄핵소추 발의 시 사유 조사 여부는 국회의 재량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그 의결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음 이 사건 소추의결이 아무런 토론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의결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토론 없이 표결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국회법상 반드시 토론을 거쳐야 한다는 규정은 없고 미리 찬성 또는 반대의 뜻을 국회의장에게 통지하고 토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토론을 희망한 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국회의장이 토론을 희망하는데 못하게 한 사실도 없었습니다.

탄핵사유는 개별 사유별로 의결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여러 개 탄핵사유 전체에 대하여 일괄하여 의결한 것은 위법하다는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소추사유가 여러 개 있을 경우 사유별로 표결할 것인지, 여러 사유를 하나의 소추안으로 표결할 것인지는 소추안을 발의하는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의사에 달린 것이고, 표결방법에 관한 어떠한 명문규정도 없습니다.

8인 재판관에 의한 선고가 9인으로 구성된 재판부로부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아홉 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재판관의 공무상 출장이나 질병 또는 재판관 퇴임 이후 후임 재판관 임명까지 사이의 공백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일부 재판관이 재판에 관여할 수 없는 경우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헌법과 법률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대비한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탄핵의 결정을 할 때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재판관 7인 이상의 출석으로 사건을 심리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홉 명의 재판관이 모두 참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와 같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할 수 있는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국 심리를 하지 말라는 주장으로서 탄핵소추로 인한 대통령의 권한정지 상태라는 헌정위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는 결과가 됩니다. 여덟 명의 재판관으로 이 사건을 심리하여 결정하는 데 헌법과 법률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상 헌법재판소로서는 헌정위기 상황을 계속해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 절차에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위법이 없으며, 다른 적법요건에 어떠한 흠결도 없습니다.

이제 탄핵사유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탄핵사유별로 피청구인의 직무집행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공무원 임면권을 남용하여 직업공무원제도의 본질을 침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노 국장과 진 과장이 피청구인의 지시에 따라 문책성 인사를 당하고 노 국장은 결국 명예퇴직하였으며, 장관이던 유진룡은 면직되었고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이 제1차관에게 지시하여 1급 공무원 여섯 명으로부터 사직서를 제출받아 그중 세 명의 사직서가 수리된 사실은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나타난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피청구인이 노 국장과 진 과장이 최서원의 사익 추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인사를 하였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유진룡이 면직된 이유나 김기춘이 여섯 명의 1급 공무원으로부터 사직서를 제출받도록 한 이유 역시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청구인은 피청구인이 압력을 행사하여 세계일보 사장을 해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계일보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작성한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사실과 피청구인이 이러한 보도에 대하여 청와대 문건의 외부유출은 국기문란 행위이고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하며 문건 유출을 비난한 사실은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나타난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세계일보에 구체적으로 누가 압력을 행사하였는지 분명하지 않고 피청구인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다음 세월호 사건에 관한 생명권 보호의무와 직책성실의무 위반의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여 304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피청구인은 관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헌법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사건은 모든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 준 참사라는 점에서 어떠한 말로도 희생자들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피청구인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하고 직책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합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재난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피청구인은 헌법상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는 규범적으로 그 이행이 관철될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정치적 무능력이나 정책결정상의 잘못 등 직책수행의 성실성 여부는 그 자체로는 소추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월호 사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으나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는지 여부는 탄핵심판절차의 판단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피청구인의 최서원에 대한 국정개입 허용과 권한남용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피청구인에게 보고되는 서류는 대부분 부속비서관 정호성이 피청구인에게 전달하였는데 정호성은 2013년 1월경부터 2016년 4월경까지 각종 인사자료, 국무회의자료, 대통령 해외순방일정과 미국 국무부장관 접견자료 등 공무상 비밀을 담고 있는 문건을 최서원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최서원은 그 문건을 보고 이에 관한 의견을 주거나 내용을 수정하기도 하였고, 피청구인의 일정을 조정하는 등 직무활동에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최서원은 공직 후보자를 추천하기도 하였는데 그중 일부는 최서원의 이권 추구를 도왔습니다. 피청구인은 최서원으로부터 케이디코퍼레이션이라는 자동차 부품회사의 대기업 납품을 부탁받고 안종범을 시켜 현대자동차그룹에 거래를 부탁하였습니다. 피청구인은 안종범에게 문화와 체육 관련 재단법인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하여 대기업들로부터 486억 원을 출연받아 재단법인 미르, 288억 원을 출연받아 재단법인 케이스포츠를 설립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재단법인의 임직원 임면, 사업 추진, 자금 집행, 업무 지시 등 운영에 관한 의사결정은 피청구인과 최서원이 하였고, 재단법인에 출연한 기업들은 전혀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최서원은 미르가 설립되기 직전인 광고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를 설립하여 운영했습니다. 최서원은 자신이 추천한 임원을 통해 미르를 장악하고 자신의 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와 용역계약을 체결하도록 하여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서원의 요청에 따라 피청구인은 안종범을 통해 케이티에 특정인 2명을 채용하게 한 뒤 광고 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 뒤 플레이그라운드는 케이티의 광고대행사로 선정되어 케이티로부터 68억여 원에 이르는 광고를 수주했습니다. 또 안종범은 피청구인 지시로 현대자동차그룹에 플레이그라운드 소개자료를 전달했고, 현대와 기아자동차는 신생 광고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에 9억여 원에 달하는 광고를 발주했습니다. 한편 최서원은 케이스포츠 설립 하루 전에 더블루케이를 설립하여 운영했습니다. 최서원은 노승일과 박헌영을 케이스포츠의 직원으로 채용하여 더블루케이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도록 했습니다. 피청구인은 안종범을 통하여 그랜드코리아레저와 포스코가 스포츠팀을 창단하도록 하고 더블루케이가 스포츠팀의 소속 선수 에이전트나 운영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최서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김종을 통해 지역 스포츠클럽 전면 개편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 내부 문건을 전달받아 케이스포츠가 이에 관여하여 더블루케이가 이득을 취할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또 피청구인은 롯데그룹 회장을 독대하여 5대 거점 체육인재 육성 사업과 관련해 하남시에 체육시설을 건립하려고 하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여 롯데는 케이스포츠에 70억 원을 송금했습니다.

다음으로 피청구인의 이러한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헌법은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여 공무원의 공익실현의무를 천명하고 있고, 이 의무는 국가공무원법과 공직자윤리법 등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피청구인의 행위는 최서원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서 공정한 직무수행이라고 할 수 없으며 헌법, 국가공무원법, 공직자윤리법 등을 위배한 것입니다. 또한 재단법인 미르와 케이스포츠의 설립, 최서원의 이권 개입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피청구인의 행위는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청구인의 지시 또는 방치에 따라 직무상 비밀에 해당하는 많은 문건이 최서원에게 유출된 점은 국가공무원법의 비밀엄수의무를 위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피청구인의 법위반 행위가 피청구인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여야 함은 물론 공무 수행은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청구인은 최서원의 국정개입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그에 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회 등 헌법기관에 의한 견제나 언론에 의한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피청구인은 미르와 케이스포츠 설립, 플레이그라운드와 더블루케이 및 케이디코퍼레이션 지원 등과 같은 최서원의 사익 추구에 관여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행위는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국회와 언론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를 단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피청구인의 지시에 따른 안종범, 김종, 정호성 등이 부패범죄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중대한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입니다. 한편 피청구인은 대국민 담화에서 진상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결정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하여 피청구인은 생명권 보호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헌법상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고, 다만 그러한 사유만으로는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그 취지는 피청구인의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법정의견과 같고, 피청구인이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으나 이 사유만으로는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 어렵지만 미래의 대통령들이 국가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 수많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상실되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피청구인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을 지적한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재판관 안창호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선고를 마칩니다.


[첨부, 사건 2016헌나 대통령 박근혜 헌법재판소 결정 89쪽]

사건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 헌법재판소 결정.pdf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10/2017031001269.html


아래 링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 관한 잡지 표지

http://henrykim.kr/6290



 
0 Comments

이 글이 속한 카테고리는 개인Private/인물Who 입니다.

 

2017 연세동문 새해 인사의 밤

2017.01.10 18:30

임오사마방회도

 
0 Comments

이 글이 속한 카테고리는 개인Private/인물Who 입니다.

 

김몽호 金夢虎 (1557년 2월 21일 ~1637년 3월 14일, 81세)

2017.01.07 13:10

자(字) 숙무(叔武) 호(號) 지봉(芝峰), 강릉김씨 26세손


서기 1557년 조선 13대 명종(明宗) 정사(丁巳) 2월 21일에 태어나, 서기 1637년 조선 16대 인조(仁祖) 정축(丁丑) 3월 14일 81세에 세상을 떠나시다. 향년 81세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2월 26일 경진 1번째기사 1587년 명 만력(萬曆) 15년

북병사 이일이 녹둔도가 함락되었다고 치계하다. (군관 김몽호의 수본에 따르면)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치계하였는데, 대개는 녹둔도(鹿屯島)가 함락되었다는 일이었다. 전교하기를,


"이 서장(書狀)을 보니, 너무도 참혹스럽고 통분하다."

하였다. 서장에 이르기를,


"군관(軍官) 김몽호(金夢虎)의 수본(手本)에 ‘지난 9월 24일 녹둔도의 접전(接戰)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신급제(新及第)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 등 11인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 향수(香水)로 목욕시키며 자세히 살펴보니, 오형은 얼굴이 가로 잘리고 목덜미 왼쪽도 비스듬히 절단되었으며 등에는 화살을 맞았습니다. 임경번은 왼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았고 얼굴에도 화살을 맞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녹둔도가 함락될 적에 장사(將士)와 군민(軍民)들은 한결같이 모두 바람에 쓰러지듯 속수 무책으로 잡혀간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지만 오직 오형 등 11인만이 모두들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로서 몸으로 적의 칼날을 막으며 죽을 때까지 항전(抗戰)하였습니다. 여러 대의 화살을 몸에 맞기도 하고 칼날에 얼굴이 베어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잘리고 눈알이 뽑혔지만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습니다. 피가 전장(戰場)을 뒤덮었고 뼈가 모래와 자갈밭 위에 널렸었습니다. 그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의거는 너무나 늠름하여 기릴 만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 선조실록 200권, 선조 39년 6월 19일 병진 15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최천건·이상의·김몽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천건(崔天健)을 형조 판서로, 이상의(李尙毅)를 행 도승지로, 유영근(柳永謹)을 홍문관 부교리로, 장언침(張彦忱)을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강욱(康昱)을 호조 정랑으로, 민영(閔韺)을 돈령부 첨정으로, 성이민(成以敏)을 【접반 사(接伴使)로 적영(賊營)에 있다가 도망하여 돌아왔으니 봉사(奉使)에 무상(無狀)했다고 할 만하다. 】 공조 정랑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응수관(應宿官)057) 은 그 소임이 매우 중한 것인데 어찌 범용한 음관(蔭官)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 공조 좌랑으로, 구사직(具思稷)을 【너무도 용렬하여 곤수(閫帥)의 직임에 합당하지 못하다. 】 전라 병사로, 노세준(盧世俊)을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엄황(嚴愰)을 【무식한 무부(武夫)로 교만 방자하였다. 】 남해 현령(南海縣令)으로 삼았다.



▷선조실록 208권, 선조 40년 2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 

감찰 임희지, 호조 좌랑 김몽호를 파직하고, 사복시 주부 박임을 체차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감찰(監察) 임희지(任羲之)는 의관(衣冠)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검속하지 않은 채 창가(娼家)에 오래 누워 있으면서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본직을 제수했으므로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사복시 주부 박임(朴任)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태복(太僕)의 벼슬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호조 좌랑 김몽호(金夢虎)는 그가 숙직한 날에 도둑의 변을 당해 오래도록 왕옥(王獄)에 갇혀 있는데 아직까지 직명을 갖고 있으므로 물정이 무척 미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먼저 파직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36권, 광해 2년 12월 22일 계사 9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신흠·황신·김상용·안창·유희발·조즙·이경험 등으로 제조와 낭청을 삼다


행 예조 판서 신흠(申欽), 호조 판서 황신(黃愼), 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을 제조로, 안창(安昶)·유희발(柳希發)·조즙(趙濈)·이경엄(李景嚴)·황경중(黃敬中)·이분(李芬)·김몽호(金夢虎)·윤안국(尹安國)을 낭청으로 삼았다. 【신흠은 문장의 우아함과 〈재주와 명망이 일세(一世)의 으뜸이며,〉 온아하고 공손하며 청렴하고 신중함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부귀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처럼 행동하였고, 권력 있는 중요한 자리는 마치 장차 자기를 더럽히기나 하듯 피하였다.〉 그러므로 왕실과 혼인을 맺었는데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고, 〈서로 투기하고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도 흠을 잡지 못하였으니, 군자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일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황신은 강직 방정하고 정직하며, 온아하고 염정(恬靜)하며, 우뚝이 스스로를 지켜 〈위엄이나 무력으로 굽히게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오랑캐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온갖 방법으로 위협을 가해왔으나, 말이 도리에 벗어나지 않고 행동거지가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끝내 오랑캐의 마음을 굴복시켜 사명(使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평소에 쌓은 바가 있는 자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국가의 법과 재정을 담당하게 되어서도 기강을 진작시키고 재정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김상용은 정직하고 꺾이지 않는 자로서,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바른말을 했다가 죄를 얻어 주현(州縣)에 근무하였었다. 왕이 즉위하자 수년 만에 정경(正卿)의 지위로 뛰어 올랐으니, 〈역시 척속(戚屬)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아 궁액(宮掖)과 왕래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사론(士論)이 좋게 평하였다.〉 유희발은 유자신(柳自新)의 아들이다. 〈조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악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비(后妃)의 지친(至親)으로 삼사(三司)에 출입하면서 〈당연한 듯이 여겨 피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남에게 뒤질까 염려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알 만하다 하겠다. 이경엄은 이호민(李好閔)의 아들로서 거칠고 혈기가 많았다. 황경중은 적신(賊臣)의 유얼(遺孼)로서 조정에서 아첨하는 자들을 편들었다. 이분은 유자(儒者)라고 이름을 내세우지만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수식을 일삼았으니, 양의 바탕에 호랑이 가죽을 씌운 사람이다.〉 . 】



▷ 광해군일기[중초본] 40권, 광해 3년 4월 13일 임오 6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윤양·김몽호·정창연·신흠·신성기·홍우·윤민헌·오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양(尹讓)을 사간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지평으로, 정창연(鄭昌衍)을 지경연으로, 신흠(申欽)을 동지경연으로, 〈신성기(辛成己)를 공조 정랑으로, 홍우(洪遇)를 호조 좌랑으로, 윤민헌(尹民獻)을 형조 좌랑으로,〉 오환(吳煥)을 부수찬으로, 〈곽천호(郭天豪)를 공조 좌랑으로, 송극인(宋克訒)을 전적으로, 유중룡(柳仲龍)을 경상 도사로〉 삼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47권, 광해 3년 11월 17일 임자 2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회환사 이순경 등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서쪽 교외에 나아가 맞이하다


회환사(回還使) 이순경(李順慶) 등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상이 서교(西郊)로 나가서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황제는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칙사(敕謝)하노라. 해 예부(該禮部)의 제칭(題稱)에 의거하면 ‘조선 국왕이 「전라도 관찰사 윤휘(尹暉) 등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중국 조정의 백성을 붙잡았는데, 모두 복건(福建)과 흥화(興化)에 거주하던 상인이었습니다. 임윤대(林潤臺) 등 32명이 경내에 이르렀는바, 배신(陪臣) 형조 참판 이순경(李順慶) 등을 차송하여 그 편에 압송하여 보냅니다.」고 주달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천조를 높이 받들고 충성과 순종을 게을리 아니함을 보고 짐(朕)은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이에 특별히 칙서를 내려 격려하고, 인하여 백금(白金)·문금(文錦)·채단(綵段)을 하사하여 부지런한 정성에 보답하는 바, 즉시 배신 이순경으로 하여금 가지고 돌아가게 하니 수령하라. 서장관과 통사(通事)인 김몽호(金夢虎) 및 종인(從人) 김득춘(金得春) 등과 순해 원역(巡海員役) 양수진(楊秀津) 등까지도 모두 부지런히 수고하였는 바 차등 있게 상품을 내려 아울러 치하하노라. 왕은 짐의 지극한 뜻을 유념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은(銀) 1백 냥, 금(錦) 4단(段), 저사(紵絲) 12벌을 유사(諭賜)하노라. 만력(萬曆) 39년 9월 12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라 감사 윤휘 등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중국의 복건과 흥화에 거주하던 사람 32명을 붙잡아 사신편에 부쳐 송환하였으므로, 황제가 칙서를 내려 장려하면서, 은·비단·저사 등을 하사하고 아울러 순해 원역 등에게도 차등 있게 상품을 하사하였던 것이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23일 무신 4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송극인을 사간으로, 남벌을 헌납으로, 김몽호를 정언으로 삼다


송극인(宋克訒)을 사간으로, 남벌(南橃)을 헌납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정언으로, 박홍도(朴弘道)를 사서로 삼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30일 을묘 3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장령 배대유·정언 김몽호 등이 황신을 처벌해야 한다고 아뢰다


장령 배대유(裵大維), 정언 김몽호(金夢虎) 등이 아뢰기를,


"황신이 평소 절친했던 이로는 김제남(金悌男)만한 이가 없었고, 김제남이 친밀하게 지냈던 이로는 역시 황신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황신이 김제남의 무리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박종인(朴宗仁)이 한 평생의 의식(衣食)을 모두 황신에게 의지했고, 황신이 박종인을 가까이 한 것이 집안의 부자간에 지날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박종인이 사람들에게서 강탈한 장물 은(銀)을 모두 황신의 집에 맡겨 두었으니, 황신이 박종인의 장물아비라는 것은 분명하여 가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박응서(朴應犀) 등 세 역적에 이르러서도 황신이 역시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황신이 탁지(度支)에 있을 때 세 역적이 공공의 조도(調度) 물자 사용하기를 집안에 쌓아 놓은 물품을 가져다 쓰듯이 하였는데, 은자 수백 냥과 면포 수백여 동을 임의로 대여해 주면서 낭사(郞舍)가 혹 주려 하지 않으면 공공연히 힐책을 하였고, 일단 대여해 준 뒤에는 즉시 완전 상환토록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오히려 미납된 부채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모두가 놀라워하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김제남의 무리이고 박종인의 장물아비이며, 또 세 역적과 체결하여 공가의 은포 등물을 감히 사사로이 대여해 주었으니, 도적에게 물자를 대준 죄가 분명하여 사람들의 감정도 지극히 놀라워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역률로 치죄당하는 것은 진실로 벗어나기 어려운 바였으니, 신들이 단지 멀리 귀양보내라고 청했던 것은 또한 가벼운 법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훈구라는 이유로 용서하여 부처(付處)에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빨리 멀리 귀양보내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신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전해들어 실상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부처했으니, 어찌 굳이 멀리 귀양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70권, 광해 5년 9월 4일 기미 2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정언 김몽호가 사직을 청하다


정언 김몽호(金夢虎)가 아뢰기를,


"어제 양사가 합계할 때, 대사헌 송순(宋諄)이 황신을 논계하는 글 가운데 ‘서양갑(徐羊甲) 등에게 은포(銀布)를 주었다.’는 한 조목을 첨입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신과 사간 송극인(宋克訒), 장령 배대유(裵大維)는 문서를 상고한 뒤에 넣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송순이 말하기를 ‘그 곡절을 자세히 들었다.’ 하였고, 지평 김극성(金克成)도 역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논계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이제 헌납 남벌의 피혐한 글을 보니, 일을 논한 게 사실과 달랐던 점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구차하게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파척하기를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황신이 죄인에게 은을 준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남벌은 사실과 다른 의논을 냈기 때문에 체직되었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70권, 광해 5년 9월 19일 갑술 5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남이공·박이서·남벌·송극인 등이 체직되다


이때 남이공(南以恭)·박이서(朴彝敍)·남벌(南橃)·송극인(宋克訒) 등이 서로 잇따라 글을 올려 체직되었고, 김지남(金止男)·김몽호(金夢虎)·최동식(崔東式)·이홍망(李弘望) 등은 모두 다른 이유로 인피해서 체직되어 시론(時論)을 피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70권, 광해 5년 9월 22일 정축 4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박로·정기광·손척·김몽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노(朴𥶇)를 수찬으로, 정기광(鄭基廣)을 병조 좌랑으로, 손척(孫倜)을 겸문학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정언으로 삼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광해 6년 1월 11일 갑자 4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대사헌 송순·대사간 윤선 등이 역적을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다


대사헌 송순, 대사간 윤선, 사간 최동식(崔東式), 장령 배대유, 지평 박홍도·조정립, 헌납 손척(孫倜), 정언 김몽호(金夢虎)·이용진(李用晉)이 와서 아뢰기를,


"역적을 토죄하는 것은 천하의 큰 법이요 종묘 사직을 위한 큰 계책입니다. 비록 임금이라도 사사로운 은혜로 그 사이에 용서해 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천하의 지엄한 대법을 지키지 않아서 종사의 지중한 대계(大計)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이후 여러 차례의 명나라 차관 행차로 인하여 정지해서는 안 될 논의를 정지함으로 하여 흉측한 역적들의 생명으로 하여금 하늘의 주벌(誅罰)을 늦게 받도록 함에 따라 화의 본원이 날로 불어나서 국가의 위난(危難)이 이미 박두하고 있으니,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빨리 법으로 다스리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변란에 대처하는 일이 이미 끝까지 갔는데 이밖에 또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광해 6년 1월 26일 기묘 7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오억령·박건·이언영·김몽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오억령(吳億齡)을 좌참찬으로, 박건(朴楗)을 대사헌으로, 이언영(李彦英)을 정언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지평으로 삼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5권, 광해 6년 2월 10일 임진 3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지평 김몽호·정언 이용진이 이의가 벌을 받지 않고 죽자 사직을 청하다


지평 김몽호(金夢虎), 정언 이용진(李用晉)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보잘것없는 재주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금의 보답도 드리지 못하였고, 조섭하시는 중에 소란스러움을 끼쳐 드렸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다만 언관과 일반 관원은 같지 않으니, 진실로 한 가지라도 마음에 온당하지 못함이 있으면 입을 다물고 구차하게 수용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의의 죄는 종묘 사직에 관련되어 신과 사람이 극도로 분통해 하였으니, 반드시 주벌해야 하는 법은 있고 용서할 만한 의리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신들이 대궐문에 엎드려 연이어 소장을 올려 매양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정성스런 마음이 깊지 못하여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분하고 원통한 마음이 있어 머리를 부수고 죽고 싶은 지가 오래였습니다. 요즈음 혹은 대제(大祭)로 인해, 혹은 옥후가 편안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정론(停論)한 날이 많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역적 이의가 병으로 죽었다 하는데, 흉악무도한 역적으로 하여금 나라의 벌을 받지 않고 갑자기 스스로 죽게 하였으니, 종묘 사직과 국가의 욕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이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게 되었으니, 신들은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책임을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어서 당대의 웃음거리가 되고 후세의 비판을 받겠습니까. 신들의 직책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5권, 광해 6년 2월 19일 신축 1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대사헌 박건 등이 독포사의 파견에 논의하지 못한 죄를 들어 사직을 청하다


대사헌 박건, 장령 배대유, 지평 유활·김몽호가 아뢰기를,


"신들이 전에 독포사를 파견하는 것이 백성을 방해하고 일을 해친다는 이유로 논의하고자 하여 일제히 모인 자리에서 발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망단자(薦望單子)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기다리느라고 〈미처 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 금부의 비밀 계사를 보니 자세한 사정을 다 갖추어 지극히 타당하였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모두 감히 말을 드려 정지할 것을 청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비난이 두려워서일 뿐이다.’ 하였으니, 신들이 바야흐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미처 논의하지 못한 죄가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들의 직책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75권, 광해 6년 2월 24일 병오 2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장령 김몽호가 정온을 논죄할 때 법도가 없는 잘못을 들어 사직을 청하다


장령 김몽호가 아뢰었다.


"어제 대론이 발의되기 전에 장령으로 발령을 받아 미처 사은 숙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사가 정온을 논죄할 적에 참석하지 못하여 모르고 있다가 오늘 연계하는 자리에 비로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정원에 내리신 전교를 받드니 신이 일을 논함에 법도가 없는 잘못은 다른 관원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의 직책을 파척하소서."



▷광해군일기[중초본] 75권, 광해 6년 2월 25일 정미 4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대사헌 박건 등이 이언영의 글에 자신들도 포함된 점을 들어 사직을 청하다


대사헌 박건, 장령 배대유·김몽호, 지평 유활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소신이 이렇게 소란한 때를 만나 상께서 정섭하시는 날에 번거롭게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매우 큽니다. 또 신들이 인피하는 동안에 두려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논의를 앞에 두고 지연시킬 수가 없기에 오늘 일찍이 동료와 함께 와서 그대로 합동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죄율을 논의하고 있다가, 간원이 바야흐로 정언 이언영을 처치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정언 강대진이 많은 관원의 의견이 귀일되었다는 이언영의 말로 인피하여 이 때문에 간원의 전원이 피혐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헌부도 많은 관원 가운데 하나이므로 처치할 수 없는 것은 간원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들의 직책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0 Comments

이 글이 속한 카테고리는 개인Private/인물Who 입니다.

 

강릉김씨

2017.01.06 08:04

강릉김씨(江陵金氏) 


강원도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한국사 최초의 분봉왕이셨던 명주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이다. 

시조 김주원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6세손으로 37대 선덕왕(宣德王)때 각간(角干)으로 시중(侍中 신라 최고 관직)겸 병부령(兵部令 군사 총책임자)을 지냈다. 신라 6만군을 통솔하는 총사령탑으로 그의 권한은 막강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그가 명주왕(溟州王)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덕왕(宣德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추대키로 했다. 그러나 그는 경주(慶州) 북쪽 20리 쯤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신회의가 열리는 날 때마침 내린 폭우로 알천閼川(현 경주시내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이에 군신들이 “이는 천명(天命)이라”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원성왕(元聖王)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모향(母鄕)인 하슬라(何瑟羅, 현 강릉江陵)로 퇴거했다. 그러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더욱 감복, 명주(溟州)일대를 분봉해 다스리도록하며 왕호를 허락한다. 명주((溟州)는 9郡25縣으로 이뤄진 신라 영토중 가장 넓은 지역이다. 아래 그 분봉토역의 내용을 싣는다.


명주(溟州) 9郡25縣 (『三國史記』卷第35 雜志第4 地理2) 

☉ 溟州(何瑟羅-河西良 현 江陵) 4領縣

① 旌善縣(현 旌善郡 旌善)

② 栜(촉)隄縣〈혹 棟隄〉(현 旌善郡 東面 추정)

③ 支山縣(현 溟州郡 連谷)

④ 洞山縣(현 襄陽郡 孫陽 추정)

1. 曲城郡(屈火 현 安東 臨河) 1領縣

①緣武縣〈혹 椽武〉(현 靑松郡 安德)

2. 野城郡(也尸忽 현 盈德) 2領縣

① 眞安縣(현 靑松郡 眞寶)

② 積善縣(현 靑松郡 靑松)

3. 有鄰郡(于尸 현 盈德 盈海) 1領縣

① 海阿縣(현 迎日郡 淸河)

4. 蔚珍郡(于珍也 현 蔚珍) 1領縣

① 海曲縣(현 蔚珍郡 近南 추정)

5. 奈城郡(奈生 현 寧越) 3領縣

① 子春縣(현 丹陽郡 永春)

② 白烏縣(현 平昌郡 平昌)

③ 酒泉縣(현 寧越郡 酒泉)

6. 三陟郡(悉直 현 三陟) 4領縣

① 竹嶺縣(현 榮州市 豊基 추정)

② 滿卿縣(현 奉化郡 奉化 추정)

③ 羽谿縣(현 玉溪)

④ 海利縣(현 東海 추정)

7. 守城郡(䢘城 현 杆城) 2領縣

① 童山縣(현 杆城)

② 翼嶺縣(현 襄陽)

8. 高城郡(達忽 현 高城) 2領縣

① 豢猳縣(현 高城)

② 偏嶮縣(현 通川)

9. 金壤郡(休壤 현 通川) 5領縣

① 習谿縣(현 通川郡 歙谷)

② 隄上縣(현 通川郡 碧養)

③ 臨道縣(현 通川郡 臨南)

④ 派川縣(현 安邊郡 沛川)

⑤ 鶴浦縣(현 安邊郡 鶴城)

 

김주원(金周元)은 명주성(溟州城)을 쌓고 영동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됐다.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신라김씨(新羅金氏) 중 제일 처음 분적한 맏집이 되는 셈이다. 


김주원(金周元)은 종기(宗基 元聖王조 시중<侍中>), 헌창(憲昌 憲德王조 시중<侍中>), 신(身 憲德王조 이찬<伊湌>)등 3명의 아들을 두어 신라조에 번성을 누렸다. 이중 둘째인 헌창(憲昌)은 헌덕(憲德)왕때 공주(公州)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일시 전라(全羅)ㆍ충청도(忠淸道)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자결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국정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강릉김씨대종회의 주장은 다르다. 즉 당시 헌덕왕(憲德王)은 조카인 애장왕(哀莊王)과 동생 예명(禮明)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왕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정권쟁탈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왕실을 바로잡고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는 앞서 애장왕(哀莊王)대 시중(侍中)으로 있다가 외임으로 청주(淸州)도독(경남(慶南)지사), 웅천주(熊川州)도독(충청도(忠淸道)지사)등을 지냈는데 중앙의 시중(侍中)에서 밀려난 데 대한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현 사학계에서도 재조명돼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아무튼 왕권에 도전했던 김헌창(金憲昌)은 거사가 실패하자 자결했고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 또한 북한산(北漢山)에서 재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맏이인 김종기(金宗基)의 손자 김양(金陽)은 서기 838년 희강(憲德王)왕 때 민애왕(閔哀王)인 김명(金明)이 희강왕(憲德王)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패륜을 범하자, 이에 분개, 청해진(靑海鎭 현 莞島)에 군사를 일으켜 경주(慶州)를 공격, 민애왕(閔哀王)을 제거했다. 그리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세우고 정권을 왕실로 돌려 국정을 바로 잡았다. 이후 김양(金陽)은 각간시중(角干侍中) 겸 병부령(兵部令)에 올랐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강릉김씨를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명문이라고 찬양했다.


현재 강릉김씨는 셋째인 김신(金身)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헌덕왕(憲德王) 2년에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왕실 기강이 문란 하자 이를 거절하고 강릉으로 퇴거, 여생을 보냈다. 그 후 후손들이 번성, 판서공 청풍파 (判書公 淸風派) 부정공파(副正公派)ㆍ옥가파(玉街派)ㆍ평의공파(評義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를 모체로 강릉김씨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 초기의 인물로는 대광 김순식(大匡 金順式), 태사삼중대광 김경(太師三重大匡 金景), 내사령 김예(內史令 金乂)등이 돋보인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고려군에 항거하다 왕건(王建)의 설득을 받고 그에게 협력,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벼슬이 대광(大匡)에 오르고 이들은 김수원(金守元)ㆍ김장명(金長命)과 함께 왕건(王建)으로부터 왕(王)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김순식(金順式)은 정확히 강릉김씨계열은 아님이 근래 밝혀졌다. 이외 왕건(王建)으로부터 왕(王)씨 성을 하사 받은 이로는 金乂의 경우가 있으나 조선 개국 후 왕(王)씨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20세 지(輊)가 원래 성인 김(金)씨로 귀성했다.


강릉김씨는 김주원(金周元)의 6세손 김식희(金式希 고려개부의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 高麗開府義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로 고려에 귀부후 명주(溟州)지부를 다스리며 후손이 세거해왔다. 강릉김씨는 고려 선(宣)ㆍ헌(獻)ㆍ숙(肅)ㆍ예(睿)ㆍ인(仁)ㆍ의종(毅宗) 등 6조에 걸쳐 <삼대팔시랑(三代八侍郞)평장사>를 배출, 융성기를 맞았다. 선종(宣宗)대의 명신 김상기(金上琦)와 그의 조카 김작여(金綽與)와 김우(金祐), 김상기(金上琦)의 아들 김인존(金仁存 태사문하시중)과 김고(金沽)형제, 김인존(金仁存)의 아들 영석(永錫)ㆍ영윤(永胤)ㆍ영관(永寬)등 3형제가 각각 시랑평장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김인존(金仁存)은 고려조에 강릉김씨를 대표하는 문무 겸비의 명신이었다. 한때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로 거란군(契丹軍)을 압록강까지 격퇴시키는데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당대의 석학으로 중요한 국사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왕(王)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한다. 왕명으로 음양서적인 ‘해동비록(海東秘錄)’, ‘시정요책(時政要策)’등을 찬(撰)했다. 그의 아들 영석(永錫)또한 당대의 석학으로 송(宋)나라 및 신라의 의서를 국민들이 보기 쉽게 편찬한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남겼다. 이 밖의 고려조의 인물로는 공민왕(恭愍王)때 동북면(東北面 咸鏡道)병마부사로 쌍성(雙城) 총관부를 공격 원(元)의 지배아래 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명신 김원봉(金元鳳)ㆍ김양남(金揚南 두문동(杜門洞 72인)등이 있다. 


강릉김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백3명을 냈다. 신라ㆍ고려 조에 비해서는 다소 기세가 꺾인 느낌이다. 조선 초기에는 김반(金伴 세종조 大司成), 김종(金悰 世祖조 大司成), 김순명(金順命 宣祖조 양관(兩館)대제학), 김세행(김세행 顯宗조 대사간-대사헌)등 석학을 냈을 뿐이다. 김반(金伴)은 성균관(成均館)에 40여년 간 재직, 세종때 수 차례나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던 분이다. 김구(金鉤)ㆍ김말(金末)등과 함께 <조선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기도 했다. 만년에 강서(江西)에 은거후 세상을 떠났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은 조선 초기인 1445년 수양(首陽)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패륜과에 통분, 끝까지 세조(世祖)에 저항하고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매운 절개와 고고한 지성,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강릉김씨의 정신적인 지주다. 3세에 이미 시(詩)에 능했고 5세때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이런 천재적재능이 온 세상에 알려지자 세종(世宗)대왕은 승정원(承政院)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을 시켜 시험해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이에 박이창(朴以昌)은 “동자지학 백학무 청송지말(童子之學 白鶴舞 靑松之末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라는 글귀로 그 댓구(대구(對句)를 재촉했다. 이에 김시습(金時習)은 서슴지 않고 “성왕지덕 황룡번 벽해지중(聖王之德 黃龍飜 碧海之中 성주의 덕을 비유하건데 황룡이 벽해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도다”)로 화답했다. 이때 시습(時習)의 나이 겨우 다섯 살로 비범한 문재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世宗)은 크게 경탄, 장차 요직에 등용할 것을 약속하고 명주 50필을 하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신동김오세(神童金五歲)’라 불렀다. 후일 그가 은거하던 설악산(雪嶽山)의 암자도 이런 연유로 ‘오세암(五歲庵)’이라 명명되었다. 5~15세까지 성균관(成均館) 대사성 김반(金伴)과 개국이래 사범지종(師範之宗)이라 불리었던 윤상(尹祥)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예서(禮書)’‘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배웠다. 그후 나이 스물 한 살 때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던 시습(時習)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역리(逆理)의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예아변시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잠깐 개는가 하면 곧 비가 내리고 다시개네, 하늘도 이 같거니 세상 인심이야 어이하랴, 나를 기리는가 하면 돌아서서 헐뜯네, 이를 숨기고 사는 것이 명예를 찾음일세)……” (『梅月堂集』卷4「乍晴乍雨(사청사우)」) 시습(時習)은 그의 유시(遺詩)처럼 갰다 곧 비내리는 변덕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영원한 야인으로 살았다.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은거. 자조적인 자화상을 그려놓고 ‘진흙구덩이에 얼굴을 쳐박아야 마땅한 놈’이라고 자학하면서 광기와 독설로 울분을 삭았다. 


이 같은 김시습의 기행(奇行)을 함석헌(咸錫憲)씨는 그의 저서 ‘성서적(聖書的)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시습(時習)이 21세의 청년으로 삼각산(三角山)중에서 독서하고 있더니 변보(變報)를 듣고 통곡한 후 책을 불사르고 발광하여 승려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명산(名山), 사찰 등에서 보내며 시대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 산사(山寺)에서 승배(僧輩)들과 무료(無聊)를 풀기도 했으며 취한 몸으로 하수구에 절벅거리기도 했다. 그렇듯 그는 일개의 광승(狂僧)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단순한 광인(狂人)이상의 것이 있었다. 항상 비분강개하여 지축을 끼고 냇가에 앉아서 글을 지어 물에 띄어 보내고는 울기도 했고 농부의 목상(木像)을 만들어 안상(案上)에 벌려 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통곡하기도 했다 또 곡식을 심어 그것이 자란즉 하루아침에 낫을 휘둘러 베어버리고 방성대곡했으며 관리의 비행을 보고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부르짖으며 호곡(呼哭)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의 가슴속을 가히 헤어릴 수 가 있다. 그의 미침은 의(義)로써 미친 것이었다. 그 가슴의 아픔이 너무 도를 지났기 때문에 미침이요 정상인으로 살기에는 그 사회가 너무 부끄러워서 미친 것이다. 어떤 때 세조(世祖)가 법회(法會)를 모으매 그도 뽑히었더니 새벽에 문득 거처(去處)를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니 길가 거름웅덩이에 빠져 얼굴 만을 겨우 내놓고 있었다. 세상을 부끄러워함이 이러하였다. 그는 실로 세조(世祖)와 그의 사업에 향하여 유령과 같이 음울한 냉소를 보내는 이었다.” 이렇듯 시습(時習)은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성종(成宗)2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봄,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금오산(金鰲山)을 떠나 서울로 왔다. 2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두고 방황하던 그가 서울에 와 보니 젊어서 친했던 서거정(徐居正)은 예문과 대제학을 지내고 있었고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 김수온(金守溫)은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이중 정창손(鄭昌孫)은 성삼문(成三問)등이 단종(端宗)복위를 도모할 당시 사위 김질(金瓆)과 함께 이 사실을 세조에게 고해 바쳐 사육신(死六臣)사건의 참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렸다. 이 때문에 시습(時習)은 그에 대해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어느날 정창손(鄭昌孫)이 초헌을 타고 입궐하는 것을 보고 ‘야! 정(鄭)가 도둑놈아 아직도 살아있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정찬손(鄭昌孫)은 시습(時習)의 기개에 눌려 못 들은 체 하고 그냥 지나쳤다 한다. 일국의 영상을 감히 ‘도둑놈’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닥칠 화가 두려워 이때부터 누구도 시습(時習)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당대의 문장이었던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만이 의리를 지켰을 뿐이다. 성종(成宗)13년 48세 되던 해, 조정에서 ‘윤씨(尹氏) 폐비문제’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자 이를 보다 못해 다시 괴나리 봇짐을 꾸렸다. 다시 시작된 유랑과 방황의 생활 10년. 마침내 성종(成宗)24년 2월 충청도(忠淸道)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숨을 거두니 이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한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았다. 금오산(金鰲山)에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할 당시 국문학 사상 불의 명작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매월당집(梅月堂集)’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유교적 성리를 근거로 하여 불교사상의 중핵적인 율벌을 체득함으로써 유ㆍ불혼합일치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국적 규격과 구조주의로부터 의연히 독립된 이방인이었다. 충렬(忠烈)과 의협심으로 끝까지 의(義)를 저버리지 않고 매운 절개를 지켰던 김시습(金時習). 그 ‘서릿발 같은 야인정신(野人精神)이 강릉김씨의 문중혼’이라고 후손 김후경(金厚卿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실장)은 말한다.


선팔판, 후팔판으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는다.


중기 이후엔 명종(明宗)~숙종(肅宗)대에 8명의 판서(先八判), 영조(英祖)~정조(正祖)대에 또 8명의 판서(後八判)를 배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선팔판(先八判)은 김첨경(金添慶 형(刑)ㆍ예(禮)ㆍ이판(吏判)), 김홍주(金弘柱 병판(兵判)),김득원(金得元 병판(兵判)), 김홍권(金弘權 이판(吏判)), 김시환(金始煥 예(禮)ㆍ이판(吏判)) 김시현(金始鉉 이판(吏判)), 김시혁(金始奕 이판(吏判)), 김시경(金時烱 병판(兵判)) 후팔판(後八判)은 김상익(金尙翼 예판(禮判)), 김상성(金尙星 예(禮)ㆍ호(戶)ㆍ이판(吏判)), 김상중(金尙重 형(刑)ㆍ공판(工判)), 김상집(金尙集 형(刑)ㆍ공(工)ㆍ호(戶)ㆍ병판(兵判)), 김상철(金尙喆 육판(육판)ㆍ영의정), 김노진(金魯鎭 예(禮)ㆍ형(刑)ㆍ이판(吏判)), 김화진(金華鎭 예(禮)ㆍ형(刑)ㆍ호(戶)ㆍ공판(工判)), 김계락(金啓洛 공(工)ㆍ형(刑)ㆍ예판(禮判))을 이르는데 이 시기에 강릉김씨는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 서울의 팔판동(八判洞)은 당시 강릉김씨 판서들이 집단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해진다. 이중 유일하게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은 김상철(金尙喆)이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英祖)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 때 우리나라의 문물, 제도를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 영조(英祖) 46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역사 연구에 많은 편의를 주었다. 이듬해 명사(明史)에 실린 ‘강감합찬(綱鑑合簒)에’ 조선왕실의 계보가 잘못 적혀 있다는 대관(臺官)의 상소가 있자 자진해서 변무사(辨誣使)로 북경(北京)에 가 그 책의 개인소장을 금지시켰다는 청제(淸帝)의 약속을 받고 귀국, ‘신묘중관록(辛卯重光錄)’을 편집ㆍ간행하기도 했다. 김상규(金尙奎 숙종(肅宗)조ㆍ대제학), 김상건(金尙建 영조(英祖)조ㆍ대사간), 김상지(金尙志 영조(英祖)조ㆍ대사성(大司成)), 김상구(金尙耈 正祖조 대사간), 강릉(江陵)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된 유현(儒賢) 김윤신(金潤身)ㆍ김 담(金 譚)ㆍ김 설(金說)등도 조선조의 명현들이다. 일제의 암흑기에 강릉김씨는 의병장 감헌경(金憲卿)과 독립운동가 김영호(金永浩)를 배출했다. 감헌경(金憲卿)은 을미(乙未)사변 이후 삼척(三陟)지방의 창의군(倡義軍)으로 의병대장 민용호(閔龍鎬)와 함께 죽서루(竹西樓)에서 일본관군(日本官軍)을 격파, 잠시 삼척(三陟)군수서리를 지내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일제(日帝) 암흑기에는 의병장(義兵將) 김연성(金演性)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로 김학구(金學九) 김진숙(金振淑) 김진선(金振璇) 김인경(金麟卿) 김연순(金演淳) 김진우(金振宇) 등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를 배출했다. 김영호(金永浩)는 3ㆍ1운동 후 상해(上海)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5년의 옥고를 치렀다. 만주(滿洲)사변 후에 중한(中韓)의 용군청사령관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 상해(上海)에서 체포되어 우리나라로 압송 도중 선상에서 자결했다. ‘날개’로 문명을 날린 이상(李箱 본명 金海卿)은 강릉김씨가 낳은 풍자문학의 백미(白眉)였다.


 
0 Comments

이 글이 속한 카테고리는 개인Private/인물Who 입니다.

 
  •